[기획-멋과 색을 짓는 사람들] 26. 한 땀 한 땀 이어온 위대한 유산
[기획-멋과 색을 짓는 사람들] 26. 한 땀 한 땀 이어온 위대한 유산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9.06.25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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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담정 정윤숙 대표
사진=유은영 작가
다른 색의 조각을 하나로 잇는 마력. 사진= 유은영 작가

그곳은 고요했다. 커다란 창에 늘어뜨린 발에는 햇살이 찰랑거렸다. 나란히 놓인 고가구들은 옛 멋이 그윽하고, 벽에는 숲과 바람을 이은 듯한 조각발이 걸려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장인의 얼굴은 잔잔한 물결처럼 평온했다.

바늘을 잡은 그의 손길을 따라 꽃, 하늘, 꿈, 시 그리고 바다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마음의 빗장이 스르륵 풀리더니, 둥그런 고요가 차올랐다. 채담정은 그런 곳이었다.

 

사진=유은영 작가
채담정 정윤숙 대표. 사진=유은영 작가

◆조각발의 멋을 되살리다

채담정에 들어서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큰 창에 늘어뜨린 발이다. 볕이 은은히 스며드는 조각발이 어찌나 멋스러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각발은 빛에 따라 달라져요. 빛이 들면 더 아름다운 게 우리 조각발의 매력이에요.”

정윤숙 대표가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조각마다 머금은 빛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고, 서로 다른 빛의 조각보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 솜씨에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사진=유은영 작가
바느질로 만든 전통 모빌. 사진=유은영 작가

전통침선문화원 채담정을 운영하는 정윤숙 대표는 손바느질로 전통 발을 만든다. 조각발은 말 그대로 천의 조각조각을 이어 햇빛을 가려주는 발을 가리킨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하나를 만드는데 꼬박 6~7개월이 걸리는 고된 일이다.

하지만 완성한 조각발을 창가에 거는 순간 그간의 힘겨움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조각발에 빠져 바느질을 한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는다.

 

사진=유은영 작가
바느질이 행복한 시간. 사진=유은영 작가

그의 발이 남다른 이유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꼼꼼히 천을 고르고, 직접 염색을 한다.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고된 천연염색을 마다하지 않는다. 풀을 만들어 먹이고 반듯하게 다림질을 해야 바느질 준비가 끝난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고른 숨으로 한 땀 한 땀 놓아가는 바느질이 수개월 이어진다. 한 호흡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아야 하는 시간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옷을 짓고 남는 조각천 하나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 자투리 천을 모아 두었다가 한 올 한 올 이어서 보자기도 만들고 발도 만들었어요. 조각보나 조각발은 한국 여인들의 정신과 멋이 깃들어 있어요.”

정윤숙 대표는 잊혀져가던 어머니의 정성을 예술로 되살려놓았고, 사라질 뻔한 우리네 일상을 예술로 지켜낸 셈이다.

 

사진=유은영 작가
쪽빛 염색 중인  정윤숙 대표. 사진=유은영 작가

◆어머니가 물려주신 사랑이라는 업

정윤숙 대표가 바느질을 시작한 건 첫 아이 때문이다. 첫돌이 된 딸에게 한복을 사주려고 며칠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맘에 드는 한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포목점을 하셨던 어머니는 해마다 손수 옷을 지어 입혔다. 사려던 한복 대신 옷감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그길로 바느질을 시작했다.

 

사진=유은영 작가
곱디고운 노리개보자기. 사진=유은영 작가

바느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자란 어린 시절은 포목점이 놀이터였고, 실과 천이 친구였다. 소문난 바느질 솜씨 덕분에 어머니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고, 가게 문을 닫고 난 뒤에도 밤을 새가며 가난한 이웃들의 옷을 지었다.

돈이 없어 며느리 한복 하나 못해주는 사람 마음이 오죽 애가 타겠냐며, “옷을 짓는 것은 마음을 짓는 것이다”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솜씨와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정 대표다.


“바느질을 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밤새워 옷을 짓고, 자투리 천 한 조각 버리지 않았던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사랑을요.”

 

사진=유은영 작가
그의 손길에 꽃이 피고 새가 탄생한다. 사진=유은영 작가

그의 솜씨는 전통 복식과 조각보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물보를 재연했고, 숄, 목도리, 토시까지 다양하다. 바느질만 아니라 염색도 직접 한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옷이 눈에 익어서인지 화려한 요즘 옷감이 통 눈에 들어오질 않아서다.

자연스럽고 고운 색을 얻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염색에 매달려 왔고, 자신만의 멋스런 색을 물들이게 됐다.

 

사진=유은영 작가
물결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그의 바느질. 사진=유은영 작가

요즘은 한 올 한 올 손으로 짠 옛 천을 찾으러 다니는 일에 빠져있다. 골동품가게를 돌며 먼지 쌓인 선반 속에 돌돌 말린 모시 한 뭉치, 광목 한 조각이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무런 색도 먹이지 않은 흰색의 천이 세월에 얼룩이지고, 빛이 바래서 멋스럽다. 자식과 남편 입히려는 마음으로 짠 것이니 기계로 짠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사진=유은영 작가
빛에 따라 달리보이는 조각보의 매력. 사진=유은영 작가

◆우리 문화를 나누는 소중한 공간

채담정은 색을 나누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2004년 문을 열었다. 그동안 자신이 지도해온 규방 공예 수업을 통해 바느질의 매력에 빠져든 이들과 ‘전통침선연구회’도 만들었다.

그중에는 10년이 넘은 실력자들도 있고, 공방을 운영하는 전문가도 생겼다. 2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가지는 ‘두올’팀도 결성됐다.

 

사진=유은영 작가
맘에 드는 색을 얻기 위해 손수 천염염색을 한다. 사진=유은영 작가

쉼 없이 바느질로 보내온 20여 년. 그 동안 연 전시회는 미국 순회전시를 비롯해 일본 후쿠오카 특별초대전까지 20여 차례를 넘어섰고, 대학교, 백화점 등 강의를 맡은 일 역시 손에 다 꼽을 수 없이 많다. 앞으로 루브르박물관에 조각발을 전시해 우리의 멋을 알리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소중히 품고 있는 희망은 전통 규방 공예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바느질 힐링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한 땀 한 땀 잇는 바느질은 근심 걱정을 싹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런 바느질의 힘을 통해 현대인의 고통을 치유하려고 연구 중이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위대한 유산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사진=유은영 작가
전통침선문화원 채담정 외관. 사진=유은영 작가


[채담정 정윤숙 대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패션산업학과 석사 졸업(한국복식사 전공)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대구 가톨릭대학교 외래교수
노동부 지정 기능전승자(제1호 보자기 장인) 선정 심사위원
전국기능경기대회 침선공예직종 심사장
2007년 한국의 전통문양을 이용한 보자기전(일본, 교토현 갤러리 소무시)
2011년 한국의 보자기와 발전(일본 히로시마현 옛 히로시마은행갤러리)
2014년 Korea Bojaki Forum(제주 저지문화마을)
2017년 Sixth Annual “Focus on Fiber” and “Korean Voices in Fiber”Sacramento Fine Art Center
2018년 한국전통수예 ‘조각보’ 작품 (일본, 후쿠오카 Asia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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