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멋과 색을 짓는 사람들] 19. 한 올 한 올 꽃피운 천년의 향기
[기획-멋과 색을 짓는 사람들] 19. 한 올 한 올 꽃피운 천년의 향기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9.05.0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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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자수공예관 대표 이숙자
사진=유은영 작가
숄에 새긴 고운 꽃 자수. 사진=유은영 작가

아름다운 풍경 앞에 ‘수놓은 듯하다’는 말을 한다. 바늘이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가기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그제야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나비가 날고 산이 봉긋 솟기까지 다시 수억 번이다.

35년 세월을 바늘과 실로 전통 자수의 길을 걸어온 장인이 있다. 비단실의 길이가 지구 열 바퀴를 돌만큼 묵묵히 수놓아 온 그의 삶이 자수처럼 아름답다. 오늘도 그의 손끝에서 초충도 난이 소리 없이 피고 있다.

 

사진=유은영 작가
연꽃병풍 앞에 선 이숙자 대표. 사진=유은영 작가

◆ 바늘과 살아온 인내의 35년

자나 깨나 수를 생각하며 살아온 이숙자 대표. 그를 만나기 위해 전통자수공예관을 찾은 날에도 틀 앞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뒤로 초충도 6폭 병풍이 눈에 들어왔다.

맨드라미가 싱그럽게 피었고, 코끝에 난향이 감도는 듯 고왔다. 오직 실과 바늘로 그린 전통 자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진=유은영 작가
금실로 수놓은 현무. 사진=유은영 작가

“자수는 바늘과 실이 수천수만 번을 움직여 그려내는 예술이에요.”

바느질 중이던 이숙자 대표는 환한 얼굴로 인사한다. 작은 작품 하나에 15일, 보통은 3~4개월이 걸리고, 큰 작품은 몇 년씩 걸리는 작업을 평생 해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고됨보다는 보람과 자부심이 가득 느껴졌다.

커다란 틀 앞에 그가 가진 건 오직 작은 바늘과 실이 전부다. 한 올씩 정성껏 놓다 보면 12폭 연꽃 세상이 펼쳐지기도 하고, 십장생의 복이 완성되기도 한다. 한 작품이 끝났을 때 얻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자수의 매력을 자랑했다.

 

사진=유은영 작가
연꽃병풍. 사진=유은영 작가

그가 전통 자수를 시작하게 된 것은 외동딸 때문이다. 시집가는 딸에게 자수병풍을 선물해 보내고 싶었다. 그길로 중요무형문화재 한상수 선생을 찾아가 자수를 배웠다. 첫 작품은 초충도였다.

첫눈에 반해 선택한 초충도는 수십 가지 기법이 쓰이는 고난이도의 작품이었다. 초보자의 실력에 모르면 묻고, 안되면 배워가며 잠자는 시간 외에 종일 수를 놓았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이것만 완성하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1년 만에 완성했다.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딸은 지금까지 그 병풍을 자신의 1호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유은영 작가
초충도를 수놓는 이숙자 대표. 사진=유은영 작가

그렇게 자수에 빠져 1993년 경북공예품 경진대회 특선을 시작으로 금상, 은상 등 해마다 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다. 장애인 소녀들에게 자수를 가르치고, 지역사회에 재능기부를 하며 표창도 수차례 받았다.

자기가 가르친 제자가 2011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서 은메달을 거머쥐는 기쁨도 맛보았다. 2001년부터는 각종 기능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내 전시회는 물론 독일, 프랑스 등 국제박람회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사진=유은영 작가
신라의 숨결을 담은 천마도. 사진=유은영 작가

◆ 경주에서 태어나 신라를 새기다

고된 바느질을 35년간 이어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이 약해져 침 몸살을 앓기도 하고, 가정에 어려운 일이 한꺼번에 닥쳐올 때도 있었다. 정신력이 흐트러져 놓은 땀을 다 풀어버린 일도 허다했다. 그래도 다시 바늘을 잡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완성했을 때의 희열 때문이다.

특히 복(福)자와 수(壽)자의 상형문자 백 가지를 아로새긴 백복백수병풍을 완성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일본 창가학회에 기증한 그 작품은 현재 동경 마끼꾸찌기념회관에 보물로 지정돼 보관 중이다.

 

사진=유은영 작가
경북공예품경진대회 대상을 받은 오방색 바늘꽂이. 사진=유은영 작가

이숙자 대표는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여고를 나온 경주의 딸이다. 자라면서 보아온 경주 이미지와 신라 문화재를 수놓은 작품이 많다.

첨성대와 다보탑은 물론 천마도와 수막새의 미소까지 그의 손끝에서 신라 천년의 숨결이 다시 태어났다. 단풍이 붉게 물들어 가는 불국사 작품은 자수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사진=유은영 작가
초충도 병풍의 한 폭인 가지. 사진=유은영 작가

◆ 전통의 부활을 꿈꾸다

전통 자수의 전승에 대한 이숙자 대표의 집념이 남다르다.

“전통 자수가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한때는 미싱 자수와 외국산 자수가 밀려와 전통 자수로 생계를 잇던 전문가들이 생업인 바느질을 포기하기도 했어요. 전통 자수의 붐이 다시 일어나려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자수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해요.”

 

사진=유은영 작가
01.한 땀 한 땀 인내로 피워낸 35년 자수 인생. 사진=유은영 작가
사진=유은영 작가
수백수천번의 바느질로 태어난 꽃 한송이. 사진=유은영 작가

전통 자수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늘 안타깝다는 이숙자 대표는 팔을 걷어붙이고 학교로 향한다. 시간을 쪼개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을 맡았다.

전통 자수에는 이음수, 평수, 가름수, 매듭수 등 50가지가 넘는 기법이 있다. 몇 가지 기법으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사진=유은영 작가
경북공예품경진대회 대상을 받은 오방색 바늘꽂이. 사진=유은영 작가

“어느 날 남자 고등학생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어요. 여자 친구 생일 선물로 직접 자수를 놓아 주고 싶어서 재료를 사러 온 거였어요. 내 수업을 들은 이후로 자수가 재미있고 좋아졌다는 아이를 보니 어찌나 예쁘던지,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이숙자 대표의 호는 난곡이다. 골짜기마다 난초 향기 가득하다는 이름처럼 그에게서 따뜻한 마음의 향기가 느껴졌다.

 

사진=유은영 작가
이숙자 대표의 작품으로 가득한 전통자수공예관. 사진=유은영 작가


[전통자수공예관 이숙자]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한상수 선생 사사
1997년 경북공예품 경진대회 금상 수상
2001년 시정발전 및 장애인복지증진 표창
2005년 대구KBS방송국 전시회
2006년 한·불수교 100주년기념 프랑스(파리)박람회 참가
2008년 중소기업 지위향상 공로 표창
2008년~2010년 전국기능대회 심사위원
2009년 지방경기대회 심사장
2009년 (사)한지나라 공예문화협회 초대작가
2011년 난곡이숙자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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