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마당 권정순 작가

섬세하고 강하게 색을 입히는 작가. 사진=김애진 작가
섬세하고 강하게 색을 입히는 작가. 사진=김애진 작가

[블로그뉴스=이세아 기자] 흔히 과거 서민의 그림으로만 알고 있는 민화. 권정순 작가의 작품 앞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

우리 민화, 이토록 우아할 수 있구나. 민화를 보자마자 이건 전 세계에 우리뿐인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권정순 작가 역시 그녀의 작품만큼 우아하다.

눈길 하나 손길 하나에 고운 품위가 느껴진다. 민화와 함께 자신만의 빛과 색을 만들어가는 작가를 만나 우리 민화의 과거와 내일을 이야기해본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완성되는 민화. 사진=김애진 작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완성되는 민화. 사진=김애진 작가

운명처럼 민화와의 만남

그건 운명이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른 순간의 느낌이었다. ‘이거다!’ 하는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민화를 처음 보게 된 선생은 민화야 말로 우리의 것을 온전히 담고 있으며, 세계에 알려야 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민화 전시장을 함께 간 친구에게 십년 후에는 세계무대에 민화를 전시하게 될 거라고 했던 젊은 날의 패기는 고스란히 지금 작가의 삶이 됐다. 선경지명이라 부르고 싶은데, 그저 반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민화를 만나기 이전에도 전통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전공이 외국어였고, 첫 직장도 외국계 회사였던 터라 언제나 우리 것, 우리 전통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죠. 남편 역시 마찬가지예요. 저는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의 전통, 남편은 고서 같은 문헌이나 인문학의 전통을 아꼈죠.”

 

공예로도 활용되는 민화작업. 사진=김애진 작가
공예로도 활용되는 민화작업. 사진=김애진 작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귀한 작품과 서적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선생 내외의 전통 보존에 대한 같은 마음 덕분이었다. 수집과 소개 정도만을 하던 작가는 결혼 생활 후 1997년 무렵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학창시절 사생대회 등에서 수상도 여럿, 서울 직장 생활 중에 일요화가회 활동을 했던 시절이 다 민화를 만나기 위한 그림공부였다고 회상한다.

결혼 초기에는 가족을 보살피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개인적인 취미로 유화를 공부했다. 그러다 민화 전시회에서 우리 민화야 말로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어떤 사명감이 작가의 심신에 불쑥 파고들었다.

 

프랑스의 러브콜을 받은 작가의 작품. 사진=김애진 작가
프랑스의 러브콜을 받은 작가의 작품. 사진=김애진 작가

수천 장의 민화를 토해내던 시절

민화를 만난 후 마음은 조급했다. 본격적으로 민화를 배우고 싶은데 어느 기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역의 소규모 모임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마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5년여의 시간 동안 모임에 참여했다. 그렇게 시간이 그냥 흐르나 했는데, 어느 날 명지대학교에서 민화전공자 선발 공고문을 보게 됐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확신한 작가는 학교에 지원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KTX가 아직 없던 시기여서 비행기를 타고 오가야만 했다. 그러나 민화와의 운명 같은 연은 계속 이어졌다. 명지대학교에서 송규태 선생을 만나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엄청난 양의 작업을 이어갔다.

당시 작가는 몇 달을 굶주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민화를 그렸다.

다른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자리 잡고 민화를 그리기 시작하면 여명이 동틀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10년 넘는 시간을 지났다.

 

보고 또 봐도 좋은 민화의 매력. 사진=김애진 작가
보고 또 봐도 좋은 민화의 매력. 사진=김애진 작가

민화의 매력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시들해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배움의 시간을 지난 선생도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한결같이 말한다.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 마음은 무척 오래가게 될 것 이라고.

실제로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과 함께 민화를 그리는 제자들이 여럿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어떤 문장이건 ‘민화’라는 단어가 나오면 작가의 두 눈에 여지없이 강렬한 빛이 서린다.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특임교수로, 한국민화연구소장으로, 한국민화학회 부회장으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작가는 민화를 전수하고 알리는 데에도 힘을 다했다. 개인전도 10회가 넘고 단체전도 30회 이상이다.

민화 작가들과 함께 전시활동도 활발히 하면서 국제학술대회와 학술지 발행 등 연구와 기록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처음 민화를 만났을 때 심장을 울리던 다짐을 하나 둘 세상에 지켜내기 시작했다.

 

작업 시간이 꽤 오래 필요한 모란도. 사진=김애진 작가
작업 시간이 꽤 오래 필요한 모란도. 사진=김애진 작가

세계로 조금씩 ‘더’ 나아가다.

인터뷰를 위해 작가를 만난 곳은 선생의 부군이 만들고 있는 유학문화전승관이다. 아직 완공 전이지만 천년 한옥과도 같은 기품이 전해지는 한옥이 여러 채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민화관이 있다.

지금은 선생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지만, 곧 전국 민화작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민화관 옆으로 자리한 소담한 한옥 한 채가 여러 곳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 중 하나인 한국민화연구소다.

선생의 민화는 무척 곱다. 색뿐만 아니라 선이 곱다. 직선에서도 굴곡이 느껴진다. 문외한의 눈에도 고급스러움이 전해지는 그림이다.

“석채를 쓰면 그래요. 분채보다 묵직하고 고급스럽죠. 천연 재료인 석채는 구하기도 만들기도 어려워요. 가격도 무척 비싸죠. 석채를 써야 그 절제된 빛이 담긴 색을 그릴 수 있어요. 재료에 대해 아는 분들은 석채 그림을 바로 알아보죠. 하지만 워낙 귀하다 보니 온전히 석채만으로 작업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요. 바탕에 분채를 바르고 그 위에 석채로 세밀한 색을 입혀요.”

 

실물같이 섬세한 돗자리묘사. 사진=김애진 작가
실물같이 섬세한 돗자리묘사. 사진=김애진 작가

작업실 한쪽 벽에 민화 한 점이 눈에 띈다. 돗자리 연습(선생은 자신의 작품에 전통 기법을 연습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다)을 위해 그렸다가 서울 단체전에 전시한 작품이다.

그곳에서 프랑스에서 온 전시 관계자에게 눈에 띄어 판매가 되고 프랑스에서의 전시를 추진하게 됐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년 전부터 같이 활동하는 민화작가들과 해외전시를 시작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시를 진행 중이다.

아마 또 다른 십년 사업이 될 것이다. 이제 오래지않아 전 세계에서 우리의 우아한 민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민화관 전경. 사진=김애진 작가
민화관 전경. 사진=김애진 작가

[민화마당 권정순]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특임교수
계명대학교 한국민화연구소장
한국민화학회 부회장
㈔한국미술협회미술대전 초대작가
경상북도미술대전 초대작가
대구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경상북도미술대전>, <대구시미술대전>, <한국민화협회전국공모전> 등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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