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최정은 기자]만족이란 단어는 단어로써만 존재할 뿐 실제로 만족하는 길은 없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만족을 애써 자신하고 자신은 곧 자만이 되기도 한다.

허나 어떤 이는 지금 만족하지 않아도 내일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꾸준히 이어간다.

심신을 다해 완성해도 만족할 수 없었지만, 내일의 희망도 버리지 않았던 하회탈 복원 전문 작가가 있다.

하회마을 안 탈박물관 관장으로 재직 중인 김동표 선생의 하회탈 조각 인생을 들어본다.

칼끝 하나 허투로 쓰지 않으려는 김동표 장인의 노력. 사진=김애진 작가
칼끝 하나 허투로 쓰지 않으려는 김동표 장인의 노력. 사진=김애진 작가

하회탈을 만나 이어진 목공의 길
하회동 탈박물관은 하회마을 안에 자리한다.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은 서울 용산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탈 박물관 안에는 원형을 복원해 놓은 하회탈 복제품들을 전시한다.

실제 하회탈을 본 사람들이라면 관내에 있는 하회탈을 보고 진품이라 착각할 정도다.

복제 하회탈을 만드는 김동표 선생은 이곳의 관장이며, 국보 하회탈을 원형과 가깝게 제작하는 하회탈 작가다.

관장은 청년시절 외국에서 돈을 벌었다. 그 돈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고 차린 것이 목공예 공방이다.

서울의 작은 공간 안에서 나무를 만지고 깎아 작은 소품들을 제작했다. 작업 속도는 느렸다.

한 가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실력에 아쉬움이 많았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작업을 끝내도 완성품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박물관 내 기념품 가게에서 인사를 하는 장인. 사진=김애진 작가
박물관 내 기념품 가게에서 인사를 하는 장인. 사진=김애진 작가

“자신할 만큼 완전한 작품이 나오지 않아 습작 시간만 길어졌죠. 그러던 어느 날 주문 제작 일이 하나 들어 왔어요. 우표 안에 그려진 탈 그림을 조각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생각으로는 그저 똑같이 하나 파주면 되겠지 했죠. 탈 조각을 끝낸 후 손님은 흡족하여 돌아갔지만, 이상하게 저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어요. 다른 조각 구상보다 탈 조각에 더 마음이 동했던 거 같아요. 계속 들여다보니 더 나은 방향으로 조각할 수 있을 듯 했죠. 내일은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를 듯싶었고요.”

그날 이후 매일 탈 그림과 조각에서 눈과 손을 뗄 수 없었다고 선생은 회상했다.

습작으로만 이뤄진 기간 동안 모아뒀던 돈도 바닥이 났다.

쫓기듯 돌아온 고향, 안동이었다. 안동으로 돌아와서도 탈 조각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배는 골아도 머리와 손은 늘 분주했다.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매일 같은 표정을 한 탈이 선생과 함께 계속 세월을 이어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탈을 매만지며 칼을 들어 표정을 새기는 작업은 즐겁고 행복한 삶 자체였다.

보기에는 영락없는 낙향이었지만 안동 하회탈을 만나는 길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몇 해가 지나 지자체와 협력해 하회마을 안에 작은 공방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 탈과 함께 터를 잡았다.

9종 복제 하회탈. 사진=김애진 작가
9종 복제 하회탈. 사진=김애진 작가

하회탈 표정 안에 담긴 희로애락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탈은 총 9종 11개로 구성되어 있다.

양반, 각시를 비롯해 중, 선비, 이매, 할미, 부네, 초랭이, 백정까지의 인물탈과 두 개의 주지이다.

하회탈의 정확한 제작자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1세기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도구나 기술력으로 보아도 따를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와 힘이 풍겨져 가면으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됐다.

원형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현대에 보존된 탈이 하회동을 지키고 있다.

하회탈의 가장 큰 특징은 관상의 표현법이다.

예부터 관상은 성품과 일생을 보여주는 역학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안 하회탈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서니 관장은 각자의 신분과 성향에 맞는 표정들을 설명했다.

김동표 장인이 온 정성을 다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김애진 작가
김동표 장인이 온 정성을 다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김애진 작가

“원형 하회탈의 세세한 표정은 탈 각각의 신분과 성격, 심지어 신체 특성까지 아주 잘 표현하고 있어요. 양반은 비가와도 뛰지 않고 물 한 잔 마셔도 이를 쑤시죠. 체면을 차리기 위한 허풍이고 배곯던 시대에 양반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의 여유이기도 했어요. 백정의 표정은 험상궂고, 파계승인 중은 능청스럽죠. 곧은 표정을 한 선비는 선비의 지조를 표현했고, 곱게 치장한 부네는 전통적인 미인상이에요. 한 쪽 다리를 저는 초랭이는 영악한 성격이 잘 들어나고요. 할매의 주름이 턱까지 쳐져 있어 박복한 살이 잘 나타났어요.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각시는 얼굴도 모르는 신랑을 맞았고 슬픈 생활을 하고 있겠죠.”

모든 사람의 얼굴은 살아온 대로 늙어간다. 태생적인 얼굴은 모두에게 있지만 주름의 모양새는 살아온 날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회탈이 9가지의 신분과 각각의 표정을 눈코입 모양과 주름으로 아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턱을 분리해 탈로써의 기능적 측면을 살린 것도 하회탈이 지닌 특징이다.

선생이 하는 복원 작업은 하회탈의 원형이 가진 그 오묘하고 섬세한 표정과 모양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똑같이 만든다 해도 하회탈 자체는 될 수가 없어요. 하회탈은 국보로 지정된 원본 자체에만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인 거죠. 국보 하회탈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해요.”

하회마을 안 하회동 탈박물관 전경. 사진=김애진 작가
하회마을 안 하회동 탈박물관 전경. 사진=김애진 작가

하회동 탈박물관 관장으로 살아가는 것
탈박물관 안에는 하회탈의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고 복제한 하회탈을 전시한다.

하회탈 제작 과정을 보여주고 직접 탈 만들기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1, 2층으로 이뤄진 박물관에는 하회탈과 국내외 다양한 탈 모형을 전시한다.

박물관은 하회탈 공방에서 이어진 것이다.

하회마을 안에 탈박물관을 개관하며 관장직을 맡은 것은 하회탈 복제 작업을 이어간 선생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관장으로 근무하면서도 하회탈 작업은 계속 이어간다.

완성품을 만들 때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도 몇 년 후 다시 보면 미세한 부분들이 눈에 거슬린다.

다시 보완해 제작하는 것을 반복한다. 아마도 끝은 없을 것이다.

지금 만족하는 것보다 내일의 만족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작업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회탈 원형이 가진 그 신비한 힘에 하루하루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선생의 노력과 끈기, 탈박물관과 하회마을의 발전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우리의 보물 하회탈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 세계에 대변할 것이다.

 

[하회동 탈박물관 김동표]
1981년 탈 전문제작실 ‘부용탈방’ 설립
1996년 탈박물관 개관
1997년 진주 탈춤한마당 세미나 <관상학적 측면에서 본 하회탈> 발표
          제1회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발 창작 탈 공모전 심사위원
1999년 영국여왕 안동 방문 기념 증정용 하회탈 제작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아시안위크 <아시아의 탈> 전시 참가
          영국 킹스턴 박물관 <한국 탈> 특별전 참가
2004년 제1회 안동 관광기념품 공모전 심사위원
2005년 <풍자와 해학 그 풍부한 표정들> 출간
2006년 <신들의 얼굴 아시아의 가면예술>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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