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최정은 기자] 백년을 넘게 산 나무는 베고 난 뒤에도 강한 기운을 내뿜는다.

짙은 향으로, 아름다운 무늬로, 따스한 질감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무가 지닌 원형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 가구는 보는 이를 무장 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고 듬직한 전통 가구를 만드는 김덕식 선생은 소나무를 닮았다.

소탈하면서도 우직하고 삶의 향기가 은은한 그는 소나무를 닮았다. 사진=김애진 작가
소탈하면서도 우직하고 삶의 향기가 은은한 그는 소나무를 닮았다. 사진=김애진 작가

볼수록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진짜 가구
거친 껍질 안에 은은한 향기를 지닌 소나무는 비바람과 눈비에도 끄떡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우리나라 대표 수종이다.

우직하면서도 소탈하고, 강인하면서도 결이 고운 소나무의 미덕을 그대로 닮은 김덕식 선생은 그저 나무와 가구가 좋아서 힘들어도 꿋꿋하게 전통 가구를 만드는 한 길을 걷고 있다.

김덕식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의 인생처럼 굽이굽이 험난했다.

청송의 가장 서남쪽, 의성과 영천, 군위의 경계 즈음에 청송木가구가 위치한다.

먼 길을 달려 도착한 마당에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방문객을 반긴다.

아담한 체구의 김덕식 선생은 전통 가구와 원목 가구, 통판 가구 등을 제작하는 목공예 장인이다.

전시장으로 안내한 선생은 제일 먼저 밀양반닫이를 보여준다.

반닫이는 앞면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 면만을 여닫도록 만든 가구다.

장인의 도구들 중에 크기별로 늘어놓은 대패가 눈길을 끈다. 사진=김애진 작가
장인의 도구들 중에 크기별로 늘어놓은 대패가 눈길을 끈다. 사진=김애진 작가

반을 여닫는다 하여 반닫이다. 밀양반닫이, 강화반닫이, 전주장, 통영장 등 여염집 안방 윗목을 장식하던 가구를 특히 잘 만든다.

그중에서 선생이 유독 좋아하는 것은 소나무로 만든 무쇠밀양반닫이다.

무쇠 장식이 지나치지 않고, 나무의 짜임이 견고하면서도 볼수록 친근감이 느껴진다.

“투명하게, 너무 완벽하게 작업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멋이 없어요. 약간 부족한 듯 하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가구가 마치 툭바리(보시기)에 담긴 된장찌개처럼 더 정이 가지요.”

반닫이 외에도 선생이 디자인한 불로초무늬를 새긴 이층장, 머릿장, 약장, 문갑, 사방탁자, 서안 등 전시장을 가득 메운 전통 가구들이 하나 같이 잘 생겼다.

원하는 가구를 원하는 크기대로 맞춤 제작해 주므로 나만의 특별한 가구, 전통 기법에 맞춰 제대로 만든 전통 가구를 찾는 이들이 알음알음 찾아온다.

20년 넘게 잊지 않고 찾아오고, 또 가구가 마음에 들어 잘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끔 코끝이 찡해진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들 덕분에 먼지 덮어쓰고 일해도 힘든 줄 모른다고.

가구를 만들 때는 소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가죽나무를 주로 쓰는데 원목 통판을 그대로 사용하려면 수령이 100~150년 정도는 묵어야 한다.

갈수록 그런 큰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고 어떤 가구를 만들지 고민하는 것도 즐거운 김덕식 장인. 사진=김애진 작가
마음에 드는 나무를 보고 어떤 가구를 만들지 고민하는 것도 즐거운 김덕식 장인. 사진=김애진 작가

열다섯 살에 시작해 평생 가구와 더불어 숨 쉬다
김덕식 선생이 처음 가구를 접한 것은 1967년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일을 하러 도시로 나갔다.

사찰 건축을 하던 대목장을 따라 다니다가 갑자기 스승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구의 한 가구 공장에 취직했는데 그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다음 해 서울 장한평으로 옮겨 처음으로 고가구(전통 가구) 만드는 일을 접했다.

솜씨가 좋았던 선생 덕분에 공장이 잘 되고, 당시로서는 대우도 꽤 잘 받았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전통 가구는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어 업체가 여럿 도산하거나 폐업했고 선생 역시 공장이 문을 닫자 자신의 공장을 차릴 계획으로 중동에 해외기능공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90년대 초반에는 돈을 꽤 벌었다. 트럭들이 줄을 서서 만들어 내는 족족 가구를 실어갈 정도였다.

그러던 1995년 겨울, 새로운 목재를 잔뜩 사서 쌓아놨는데 옆 공장에서 불이 나면서 가구공장이며 인근의 공장들까지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

가구며 목재가 순식간에 재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다시는 가구를 만들지 않겠노라며 고향 땅 청송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거래하던 가구점에서 돈과 목재를 줄 테니 가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바람에 다시 하나 둘씩 가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청송木가구가 됐다.

홈이 안쪽에 있어 아는 사람만 열 수 있는 문갑은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다. 사진=김애진 작가
홈이 안쪽에 있어 아는 사람만 열 수 있는 문갑은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다. 사진=김애진 작가

나무속에서 가구를 보는 사람
한 푼도 없이 다시 시작해 화재로 진 빚을 갚고 아들을 외국 유학까지 보내고 나니 10년이 훌쩍 지나있더라고.

지금은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가구를 제작하고 있다.

가업을 잇겠다고 내려온 아들 덕분에 제품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도 만들고, 경북 공예품대전에 출품해서 3년 연속으로 수상도 했다.

그동안은 민망하기도 하고 먹고 살기에 바빠서 작품을 어디 내놓을 생각도 못했던 것.

갈수록 전통 가구를 찾는 고객이 줄어드는 마당에 막상 아들이 이 일에 뛰어든다니 걱정 반 고마움 반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나무를 옛 선조들의 지혜와 문화가 녹아있는 전통 가구로 되살리기까지 길고 힘겨운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그 일에 대한 보답은커녕 제대로 가치를 인정해 주지도 않는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홈이 안쪽에 있어 아는 사람만 열 수 있는 문갑은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다. 사진=김애진 작가
홈이 안쪽에 있어 아는 사람만 열 수 있는 문갑은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다. 사진=김애진 작가

어쩌면 선생 자신이 힘겨워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가구를 만드는 동안 위안을 받았던 것처럼 아들도 나무 작업을 통해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공장 한 쪽에 유난히 결이 예쁜 목재가 놓여 있다.

“느티나문데 무늬가 참 곱지요? 요 녀석으로 뭘 만들까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납니다.”

머릿속이 온통 가구 만드는 생각으로 꽉 찬 사람. 그게 바로 김덕식 선생이다.

목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마치 이미 완성된 가구를 사랑스럽게 만지는 듯하다.


[청송木가구 김덕식]
1952년 경북 청송 출생
1965년 전통 가구 제조업계 입문
1986년 고당공예(서울) 대표
1996년 청송이조가구(현 청송木가구) 대표
2008년 대백프라자갤러리(대구) 기획전
2015년 제45회 경상북도 공예품대전 은상(통영장)
2016년 제46회 경상북도 공예품대전 특선(개량강화반닫이)
2017년 제47히 경상북도 공예품대전 특선(불로초이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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