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정세인 기자] 어떤 분야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무작정 그것만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마냥 좋아서 하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발전은 거기부터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은 궁금함을 직접 풀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 가지 궁금증이 해소되면 다음 질문에 답을 다시 찾는다.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전진하는 것이 발전이다.

탈공예를 접하며 그 길 끝에 명장이란 이름을 단 김완배 선생의 끈기와 집념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하회탈 품위를 지키기 위한 김완배 명장의 세심한 손놀림. 사진=김애진 작가
하회탈 품위를 지키기 위한 김완배 명장의 세심한 손놀림. 사진=김애진 작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탈의 길
1960년 대 중반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에 힘겨워하며 무엇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김완배 선생이 자의반 타의반 선택했던 것은 목공예였다.

지금이야 소목, 대목, 목공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저 나무로 만든 가구였다.

“어느 날, 대한민국 미술대전이라는 국전에 관람을 갔어요. 그곳에서 제가 충격을 받은 거죠. 같은 나무인데 가구와 목공예는 큰 차이가 있었어요. 저것이 무엇일까? 목공예에 대한 관심의 시작됐던 거죠.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죠. 무작정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들을 전국적으로 수소문해봤어요. 서울을 비롯해 지방 몇 곳에 목공예 학교가 운영 중이었지만, 커리큘럼을 꼼꼼히 비교해보니 부산에 있는 홍익 목공학교라는 곳이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어요.”

신나는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한 지 8개월 정도 흐른 어느 날,

학교장은 선생을 불러 학교의 총 관리를 부탁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젊은 패기는 물론 목공예에 대한 애정은 급상승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아둔 연구자료를 보며 설명하고 있는 김완배 명장. 사진=김애진 작가
모아둔 연구자료를 보며 설명하고 있는 김완배 명장. 사진=김애진 작가

그렇게 3년이 넘는 시간을 목공예 학교 관리직으로 근무했다.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 목공예 수업은 물론 건물과 인력 관리, 회계와 총무, 영업마케팅 등 전반적인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김완배 명장은 지금까지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 1975년 경 김완배 명장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관 설립을 위해 안동으로 왔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공예분야에 대한 지역적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선생 역시 생계를 위해 소목 작업과 목공예를 겸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가면극연구회가 가면극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들이 착수되고 있었다.

가면극에는 춤추는 사람, 악기 다루는 사람,

탈 만드는 사람 등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탈의 인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선생의 길은 1980년 대 탈 보존회를 중심으로 하는 법인을 설립하기에 이르고 자연스럽게 탈 공예로 이어졌다.

무언가 집중적으로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는 상황에 맞춰 꾸준히 길을 이어갔다.

명장이 되려고 했던 일들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명장의 길은 그렇게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간 셈이다.

김완배 명장이 만든 하회탈 초랭이. 사진=김애진 작가
김완배 명장이 만든 하회탈 초랭이. 사진=김애진 작가

궁금증을 풀어가며 얻는 삶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에 충족해야 한다.

30년 이상의 경력은 기본이며 해당 분야에서의 창조성, 국가사회기여도, 업계 기여도, 사회봉사, 수상 및 전시 경력, 전문 학술지 기고까지 총체적인 활동사항에 종합 평점이 90점 이상이어야 명장 자격이 주어진다.

김완배 명장은 탈 공예를 만나고 안동의 하회탈을 연구하며 공예 분야의 능력과 이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 사업은 물론 학술대회 논문 발표, 지역 사업 기획과 프로젝트 제작까지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작업을 이어왔다.

명장이 해온 일들은 단순히 생계 부지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탈 공예 작업을 하면서 우리 전통 제작법들을 찾아 연구하고 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40년 세월 동안 돌처럼 굳어진 나무 작업대. 사진=김애진 작가
40년 세월 동안 돌처럼 굳어진 나무 작업대. 사진=김애진 작가

나무에 탈 밑그림을 그리고 깎는 방법부터 그 위에 칠하는 재료들의 차이까지, 궁금하면 찾아내고 모르면 공부해 가며 전통을 지키며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했다.

원형 하회탈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기품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한 연구였다.

모든 것들을 기록했고 보관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들에 대해 원고를 작성하기도 했다.

여러 학술 논문지에 논문을 발표했고, 안동박물관이 발간한 단행본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에서 ‘하회탈 제작 과정과 조형기법’을 서술하며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무지한 시작이었으나 각고의 노력은 빛난 결과물들을 토해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길이라고 선생은 설명한다.

궁금증을 질문으로 끝내지 않고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결국 찾아내는 것, 그것은 곧 역사가 된다.

김완배 명장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방. 사진=김애진 작가
김완배 명장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방. 사진=김애진 작가

국보를 국보답게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하회탈은 전통 탈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됐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된 후에 전국 각지에서 복제 하회탈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회탈은 양반탈, 각시탈, 중탈, 선비탈, 부네탈 등 총 9가지의 탈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회동에서 발견되어 하회탈이라 불리지만 사실 이 부분 역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 원형을 직접 본 사람들도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국에 있는 공장 생산 탈들이 하회탈이란 이름으로 판매되는 것이 안타깝죠. 하회탈 원형이 가진 품위에 완전히 다다른 복제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적 보물이라는 이름에 맞는 취급과 유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조금 더 안동과 하회마을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가는 단계이니, 나아가 더 많은 이들이 하회탈의 가치와 자긍심을 알게 되길 바라고 있어요.”

김완배 명장의 길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탈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민속 조각품과 공예품들에 대한 연구도 이어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남겨지게 될 결과물들을 기대하며, 우리 민속공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높아지길 기원해 본다.


[천우공예 김완배]
1978년 하회별신굿탈놀이 복원 공동참여
1982년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 사단법인 설립
1990년 격월간 <안동> 운영위원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108호 목조각장 이수
          미국 워싱턴, 캘리포니아주 9개 도시 순회 전시
2005년 하회탈문화원형콘텐츠 기초연구 참여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 공저
2008년 안동공예문화전시관 제 2대 관장
2009년 경상북도기능경기대회 심사장
2010년 경상북도 관광공예품공모전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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