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쇠와 나무를 깨우는 사람들] 17.마음의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다
[기획-쇠와 나무를 깨우는 사람들] 17.마음의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다
  • 최정은 기자
  • 승인 2018.10.23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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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뉴스= 최정은 기자] 권영학 궁장은 그 자신이 활이자 화살이자 활쏘기다.

과녁을 향해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후에는 망설임 없이, 곁눈질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과녁의 정 가운데에 가 닿는 것. 그 모든 과정이 궁장 자신의 삶이다.

활 만들기를 과녁으로 정한 이후로는 평생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마음을 다해 매진했더니 관중(화살이 과녁 한복판에 맞음)의 결과로 궁장, 명궁, 명무의 영광을 얻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만의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그는 진정한 활의 명인이다.

활의 몸체를 이루는 산뽕나무. 사진=김숙현 작가
활의 몸체를 이루는 산뽕나무. 사진=김숙현 작가

활의 고장 예천을 대표하는 인물
예천은 우리나라 최고의 활의 고장’이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무형문화재 궁장과 궁시장이 모두 예천에 있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린 우리나라 양궁 역사의 시초가 된 김진호 선수도 예천 사람이다.

특히 김진호 선수는 1979년 고교생의 몸으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예천을 활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이가 있으니 바로 궁장 권영학 선생이다.

본인은 국궁을 쏘는 궁도인이지만 세계를 무대로 하려면 양궁을 가르쳐야 함을 알고 1972년 예천여중·여고에 양궁부를 창설해 10여년 넘게 지원 육성한 이가 바로 권영학 선생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태어난 예천읍 왕산리는 1900년 초부터 활을 만들던 마을이다.

선생의 선친, 조부도 활을 만들며 평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말에 활 제작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해방 후 풀렸다가 다시 한국전쟁으로 몇 년간 중단되기도 했다.

권영학 궁장이 도지게를 양쪽에 다 묵기 위해 활 끝을 발가락 사이에 고정하고 있다. 사진=김숙현 작가
권영학 궁장이 도지게를 양쪽에 다 묵기 위해 활 끝을 발가락 사이에 고정하고 있다. 사진=김숙현 작가

활을 만들고 활을 쏘는 아버지 밑에 자라면서 권영학 선생도 자연스레 활 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활 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선생 혼자 뒤에서 지켜보면서 독학으로 쏘는 법을 익혔다.

활 쏘는 건 재미있었지만 활 만드는 가업을 자신이 이을 것이라고는 선생도 몰랐다.

당시 농촌에서는 공부 좀 한다하는 자식은 공무원 시키는 게 꿈이었다.

선생은 대학 3년에 당시 4급 공채에 합격했는데 결국 공직에는 나가지 못했다.

공무원이 되는 것보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6·3항쟁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사람들이 잡혀 고문을 당하거나 의문사로 죽기도 했는데 정작 선생은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고.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수배를 받아 입대를 해야만 했다.

젊은 시절 권영학 궁장의 활쏘는 모습. 사진=김숙현 작가
젊은 시절 권영학 궁장의 활쏘는 모습. 사진=김숙현 작가

제대한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공무원은 물론 어떤 회사에서도 그를 받아줄리 만무했다.

1982년까지 출국도 금지 당했으니 이민을 갈 수도, 직업을 얻을 수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업을 이어 활을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활을 만든 것은 그에게 전화위복이었다.

어려서부터 활을 쏘면서 느꼈던 불편 사항을 개선하고 두꺼운 몸체를 좀 더 가늘고 유려하게 바꾸었다.

선생의 솜씨가 소문이 나자 활을 사러 찾아온 이들이 서로 먼저 사가려고 원래 값보다 2배, 3배로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명궁 트로피와 각종 상패 앞에 선 권영학 궁장. 사진=김숙현 작가
명궁 트로피와 각종 상패 앞에 선 권영학 궁장. 사진=김숙현 작가

궁장, 명궁, 명무 3개의 타이틀 보유
여름철에는 재료를 준비하고 본격적인 제작은 10월부터 봄까지 하므로 활 하나를 만드는데 꼬박 1년이 걸린다.

재료는 물소뿔, 대나무, 산뽕나무, 참나무, 민어부레, 소심줄 6가지가 기본이다.

물소뿔로 만들기 때문에 뿔 각(角)자를 써서 각궁이라 하고 양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궁이라고도 한다.

활 만들기는 대나무와 산뽕나무를 연결해 활의 몸체를 만드는 노루발작업, 물소뿔을 활 몸체에 붙이는 부각, 활의 균형을 잡는 해궁의 과정으로 진행되고 활의 최종상태를 점검하면 완성된다.

평소에는 시위를 풀어 놓고 활을 쏘기 전에 시위를 걸어야 한다.

시위를 계속 걸어두면 활의 탄성이 저하되어 쓸 수 없어진다.

시위를 걸었을 때 ‘얹은 활’ 풀어 놓았을 때 ‘부린 활’이라고 부른다.

부린 활을 헝겊으로 만든 궁대에 넣어 보관한다.

권영학 선생은 활 만들기와 함께 활쏘기에도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궁장, 명궁, 명무 3대 공인 기능보유자로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활 제작 기술을 가진 궁장, 대한궁도협회가 인정한 명궁, 전주대사습놀이 궁도부 장원에게 주는 명무 타이틀까지 보유한 유일한 인물이다.

각종 궁도대회에서 150회 이상 입상한 국내 최다기록 보유자로 1996년에 선수생활은 은퇴했다.

해궁의 마지막은 시위를 당겨보는 것. 사진=김숙현 작가
해궁의 마지막은 시위를 당겨보는 것. 사진=김숙현 작가

명상하듯 활을 만들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정신수련을 위해 활을 쏘았어요. 나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활을 쏩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물질만으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요. 활을 잘 쏘는 비결을 물어올 때 마음으로 쏘라고 말해줍니다. 마음을 비우고 몰아의 경지에 이르면 나
와 활, 과녁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 활을 쏠 수 있어요. 물론 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스스로 깨우치는 게 있지요.”

선생은 한번도 3대 기능 보유자가 되려고 목표를 정했다거나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열심히 하다 보니 그 위치에 자연스레 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거실에 ‘진광불휘(眞光不輝)’ 네 글자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딱 너를 설명하는 글귀인 것 같다”며 선물했다.

 ‘참된 빛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처럼 선생은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생 명상을 하듯 활을 만들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시켜 왔다.

지금도 활 주문은 많이 들어오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받는다고.

체력은 예전만 못해도 활을 최종 점검하는 선생은 눈빛은 화살촉처럼 날카롭다.


[예천 궁장 권영학]
1943년 예천읍 왕신리 출생
1958년~ 선친으로부터 조궁술 전수
1981년~ 미국, 스위스, 독일, 중국, 일본 등 15개국 초청전시
1989년 경북무형문화재 6호 궁장
2015년 대한민국무형문화재 47호 궁장
1968년~94년 경북궁도대표 선수 겸 코치, 감독
1972년~83년 예천여중·여고 양궁부 창설 육성
1983년~ 대한궁도협회 공인 심판 및 사범(궁도 공인 6단)
2015년~ 예천세계활축제 추친위원회 고문
            전국체전 개인·단체 금·은·동 11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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