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쇠와 나무를 깨우는 사람들] 14.첫사랑처럼 설레는 은장도의 매력
[기획-쇠와 나무를 깨우는 사람들] 14.첫사랑처럼 설레는 은장도의 매력
  • 정세인 기자
  • 승인 2018.10.11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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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뉴스=정세인 기자]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기억하는가?

처음이라 낯설지만 더없이 설레었던 그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주곤 한다.

고준정 선생에게 은장도는 첫사랑이었다.

매혹적인 첫 만남에 마음이 설레어 한평생 그것만을 바라보게 만들었으니 첫사랑치고는 꽤나 강렬했던 셈이다.

붉은 사과가 탐스러운 어느 가을날, 선생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영주로 향했다.

스승이 남긴 100살이 넘은 풀무는 지금도 짱짱하다. 사진=김숙현 작가
스승이 남긴 100살이 넘은 풀무는 지금도 짱짱하다. 사진=김숙현 작가

봉화에서 풍기까지 매일 4시간씩 출퇴근
고준정 선생은 경북무형문화재 22호 고해용 유기장의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선친의 유기 공장에서 놀면서 자라다보니 유기와 금속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성인이 된 후 유기공장의 한편에서 무속인들이 사용하는 칼을 만들었다.

무속인의 칼은 일반적인 칼에 비해 크고 보여주기 위한 장식적인 면이 강했다.

꼼꼼하면서도 시원스런 솜씨를 인정받아 주문이 꽤 들어왔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은장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 뼘 길이의 은장도에 작고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고, 칼집에는 장난감처럼 작디작은 칼이 들어있었다.

같은 칼이지만 크고 강한 느낌의 무속인 칼과 작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은장도는 극과 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혀 달랐다.

고준정 장인이 만든 초미니 사이즈의 은장도. 작은 크기지만 칼을 뺄 수 있다. 사진=김숙현 작가
고준정 장인이 만든 초미니 사이즈의 은장도. 작은 크기지만 칼을 뺄 수 있다. 사진=김숙현 작가

은장도의 작은 세계에 흠뻑 취해버린 선생은 무속칼 대신 은장도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렇게 무작정 장도를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김일갑 선생을 찾아갔다.

당시 고준정 선생은 봉화에, 김일갑 선생은 영주 풍기에 살았다.

갈 때 두 번 올 때 두 번 매일 4번씩 4시간을 넘게 버스를 갈아타면서 김일갑 선생 매장을 오갔다.

먼 길을 마다 않고 배우러 찾아오는 게 기특했는지 스승은 그를 전수 장학생으로 받아줬다.

전수 장학생 지정을 받고 이수를 완료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장학생이 되기 전 이미 스승에게 7년간 배웠으니 총 12년이 걸린 셈이다.

손에 쏙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지만 장도 만들기를 마스터하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린다.

이수를 완료한 이후에도 모르는 것이 있거나 궁금할 때면 스승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영주은장도 고준정 장인. 사진=김숙현 작가
영주은장도 고준정 장인. 사진=김숙현 작가

100년 넘은 풀무질에 추억이 방울방울
영주은장도공방에는 두 개의 보물이 있다. 김일갑 선생의 스승이었던 유덕목 장인이 쓰던 100년 넘은 풀무와 조각용 나무틀이 그것이다.

풀무는 불을 지필 때 바람을 불어넣어 불이 잘 붙게 도와준다.

일반적인 풀무의 열배 크기도 넘는 스승의 풀무는 1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도 짱짱하게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은을 녹일 때 숯을 사용하는데 숯불을 순간적으로 확 피워 올리려면 일반 풀무로는 어림도 없다.

풀무질을 할 때마다 숯불이 확 일어나면서 스승에게 사사 받던 시절이 떠올랐다가 사그라지곤 한다.

작아서 쉽게 생각했던 장도 만들기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끝이 없었다.

영주은장도 고준정 장인. 사진=김숙현 작가
영주은장도 고준정 장인. 사진=김숙현 작가

크기는 작지만 실제 칼과 똑같이 견고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야 하고, 은을 얇게 펼쳐서 십장생 등 원하는 무늬를 새겨 넣어 칼집과 칼자루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칼집과 칼자루 사이를 연결하면서 칼날이 빠지지 않게 하는 장석을 만들어 세 부분을 차근차근 조립하면 은장도가 완성된다.

은 대신 물소뿔을 써서 만든 까만색 장도는 세련된 맛이 있고, 크기를 키워 나무로 만든 장도는 남성에게 어울린다.

가죽끈이나 비단실을 엮어 고름에 달거나 허리춤에 차서 시용했다.

여인들이 좋아했던 은장도는 장식뿐만 아니라 정절의 상징으로도 쓰였다.

영주에는 은장도로 정절을 지킨 박씨 여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대표적인 장도 작품들. 사진=김숙현 작가
대표적인 장도 작품들. 사진=김숙현 작가

은장도와 지역 문화를 접합 시킬 터
고준정 선생은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끝없이 솟아나는 화수분 같은 머리를 지녔다.

지역의 역사나 문화를 상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재미를 느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영주 최대의 역사유적지인 소수서원 취한대에 ‘敬(경)’자 바위가 있다.

신재 주세붕이 이곳에 왔다가 새긴 글자로 ‘경천애인’의 첫 글자다.

‘敬’자를 은판에 새겨 칠보로 색깔을 입힌 관광상품, ‘敬’자를 티스푼 손잡이 부분에 새긴 상품, ‘敬’이나 ‘忍(인)’을 새겨 넣고 체험객이 색깔을 입힐 수 있게 한 상품 등을 기획했다.

초미니 사이즈 은장도를 올린 반지도 이채롭다.

은장도 반지는 그 모양만으로도 눈길을 끄는데 보통 크기의 은장도와 마찬가지로 칼이 실제로 빠진다.

이렇게 작은 은장도에서 칼이 빠지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더 인기를 끌었다고.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궁리하고 상상한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현실화시키는 작업이 무척 즐겁다.

손가락보다 가는 은장도에 새긴 섬세한 무늬. 사진=김숙현 작가
손가락보다 가는 은장도에 새긴 섬세한 무늬. 사진=김숙현 작가

주부가 다양한 재료와 양념으로 요리를 해 고명을 올려 마무리하듯, 선생은 작은 공예품 위에 알록달록 재료를 고명처럼 얹어본다.

장시간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작업하다 보면 허리가 아플 때도 있고, 연장을 작업대에 앉으면 하루가 금세 저문다.

“목걸이나 브로치 같이 내가 만든 장식품을 걸고 나가는 게 예전에는 너무 민망했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본인도 쓰지 않는 것을 누가 돈 주고 사가겠냐고 하시는데 그 말이 맞더라구요. 지금은 일부러 제 작품을 걸고, 달고 다녀요. 보시고는 멋지다고, 예쁘다고들 해주세요.”

제작 시연을 해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조잘조잘, 하하호호 말도 많고 웃음도 많다.

그 모습이 딱 여고생 같다. 즐겁게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바로 만들어보는 선생의 모습이 보기 좋다.

선생의 뜻대로 영주의 역사·문화를 은장도라는 전통공예와 잘 융합시킨 멋진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영주은장도 고준정]
1957년생 경북 봉화
1994년~ 경북무형문화재 15호 영풍장도장 (고)김일갑옹 사사
2001년~2006년 경북무형문화재 15호 영풍장도장 전수장학생 선정·이수
2003년 33회 경북공예품경진대회 입선
2006년 10회 경북관광기념품 공모 입선
2009년 동양대학교 보석귀금속학과 졸업
2010년 13회 대한민국영남미술대전 특선
          35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특선
2012년 16회 경주관광기념품 공모전 동상
2003년 영주풍기인삼축제 참가
2011년 경주엑스포 참가
2012년 영주선비문화축제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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